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국 동맹 전쟁 (문단 편집) ==== 국가 파탄과 사회적 변화 ==== 이렇게 전쟁은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결과는 [[브라질 제국]]과 [[아르헨티나]]에게 영토를 왕창 빼앗기고 약 6년간 이 두 국가의 군정 통치 아래 임시정부 체제로 있었다. 인구는 53만 명에서 22만 명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으며 이 여파로 경제도 붕괴되고 그와중에 일부 극소수가 경제를 휘어잡아 중남미에서 넘치는 빈부격차 문제가 여기에서도 생겨나 내부 분열 및 갈등이 커졌다. 파라과이의 인구는 해외 이민 유입과 고출산으로 회복은 되었지만 파라과이가 얻은 상처는 '''21세기에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인구 피해가 극심했다. 전후 파라과이의 성인 남성 인구는 앞에서 나온대로 3만 명이었고 거의 모두 오랜 전쟁으로 앙상한 뼈와 총상, 자상만 남은 해골이나 마찬가지라 야생 재규어, 악어의 좋은 먹잇감으로 비전투 손실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남녀 성비 '''1:9'''라는 극악의 비율이 완성되어[* 이때 어느 지역에서는 '''1:25'''라는 비상식적 성비가 나왔다.] 그나마도 남은 남자는 생식력이 없는 아주 어린 아이나 아주 늙은 노인들이 대다수였고 성인이나 청소년 '''남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전설상의 아마존 여인국이나 마찬가지인 전세계사 최악의 [[여초]] 성비 불균형'''으로 기록되었다. 한마디로 나라 안에 남자의 씨가 거의 마르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강간]] 등 [[성범죄]]나 [[사생아]] 문제가 컸지만 도저히 해결방법이 없고 어떻게든 인구를 늘려야 해서 정부는 '''아예 손을 놓아 버렸다.''' 이 극악 여초 사회화로 비극적인 관습들이 탄생하고 말았다. 전쟁 이후 주둔한 브라질 제국군, 아르헨티나군에게 강간을 당한 뒤 임신한 여자들은 피부가 검은 아이가 태어나면[* 브라질 제국군은 전쟁에서 이겨먹으려고 흑인 노예들을 전쟁이 끝나면 노예 해방에 출세도 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대거 입대시켰다. 완전한 해방은 약 20년 뒤에야 이루어졌지만 적어도 당시 참여한 흑인 병사들은 해방되었고 아주 약간이지만 출세도 했으니 어쨌든 약속은 지켰다. 아르헨티나도 흑인 병사가 있었지만 여기는 아르헨티나 문서를 보듯이 전쟁에서 가장 생존률이 희박한 곳으로만 보내서 살아나오기 너무 힘들었다.] 바로 죽여 버리는 관습을 만들었고[* 물론 인구 증가에 혈안이었던 파라과이 정부가 허용할 리가 없었고 걸리면 처벌을 받았다.] [[성문화]]의 타락과 [[성폭행]], 성적 학대에 관대해졌다. 거기에 젊은 여자나 혼기 지난 여자들이 워낙 남자를 보기 힘드니 성욕 해소 및 강간 피해 보복차 어린 소년을 납치하고 [[강간]]을 벌였다. 전쟁 이전에 [[체스]]를 두고 [[바이올린]], [[플룻]] 연주와 [[시]] 낭송, 문학 토론이 활발할 정도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은 아순시온을 남미의 문화중심, 남미의 파리를 목표로 발전시켰고 전쟁 전에는 그 직전까지 갔다.] 우아한 문화의 도시였던 아순시온 거리는 전쟁 이후 끔찍한 강간이 벌어지는 지옥으로 변했고 대낮 광장과 길거리에서 남자가 여자를 대놓고 강간해도 성범죄냐, [[매춘]]이냐, 그냥 서로 즐긴 [[화간]]이냐 따질 수도 없었고 남자들은 이를 파라과이 남자의 특권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소수의 남성들은 [[PTSD]]와 보상 심리 등으로 더더욱 여자들을 강간했다. 여자들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한 채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성인 여성들이 미성년자 남성들을 강간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났다. [[일부다처제]]는 전쟁 이후 무려 80년이 넘어가면서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가 폐지되었지만 현재도 이런 [[남성 우월주의]]적인 관념들은 전쟁 이후 파라과이에 뿌리깊게 남아 있다. 특히 전쟁 이후 성인 여성들한테 강간당한 미성년자 남성들이 성인이 된 후에는 성비가 회복된 데다 미성년자 시절에 성인 여성들한테 강간당한 남성들의 [[보상심리]]도 더해짐과 동시에 보복해야겠다는 마음이 적용되어 남성 우월주의 사회로 바뀌어 여성들은 권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권력에서건 물리적인 힘에서건 자신이 강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약자들한테 원한 살 만한 짓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약자였던 피해자들의 입장에선 기존에 자신들한테 위해를 가하던 상대가 권력을 잃던 신체적으로 약자가 되던 간에 더 이상 이전처럼 자신들한테 위해를 가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어떤 식으로는 보복하기 마련이다.] 파라과이로서는 남자가 너무 없어서 다급해져 차별받던 인디오, 즉 원주민과 흑인 노예들까지도[* 차별을 증오했던 집정관 프란시아 박사가 통곡할 내용인데 로페스 대통령 시절에는 차별 정책이 꽤 있었다. 이 차별정책에 이를 갈던 인디오와 흑인 노예들은 3국 동맹군에게 아주 협조를 잘 해 줬다.] 다시 파라과이 국민으로 우대하고 끌어들여 [[혼혈]]이라도 이루게 했고 스페인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후 이들에게 행하던 차별 탄압 정책도 폐지했다. 심지어 파라과이 전후 복구작업에 돈 벌러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까지도[* 주로 유럽인, 아랍인, 인도인.] 본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국적을 받고 남아서 제발 파라과이 국민으로 살아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로 전쟁으로 줄어든 인구의 회복이 다급했다. 결과적으로 파라과이는 중남미에서 원주민, 흑인들에게 꽤 관대하게 대하고 [[혼혈]]도 잘 이뤄졌다. 그나마 파라과이는 이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나 [[볼리비아]]의 선공으로 시작된 [[차코 전쟁]]에서 승전하여 3국 동맹 전쟁에서 잃은 땅만큼은 아니라도 북동쪽 일대로 새 영토를 넓히는 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